‘염력’ 정유미 vs ‘리턴’ 봉태규, 한국 악당 캐릭터의 현주소

2018-02-06 13:38:46



자극적이고 단조로운 악당들만 계속 생산해낸다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시사회에서 본 <패딩턴 2>는 귀엽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 영화였다. 심지어 여기엔 패딩턴을 괴롭히는 악당 피닉스 뷰캐넌도 해당된다. 휴 그랜트가 연기하는 이 한물 간 배우는 결코 시시한 악당이 아니다. 패딩턴이 끊임없이 곤경에 빠지고 이야기가 서스펜스를 얻는 것은 그가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까지 악당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피닉스에게 소모적인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온가족이 보는 가족영화이니 그런 캐릭터였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닉스 뷰캐넌이 그런 거 없이도 악당 역을 그렇게 말끔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비슷한 예가 하나 더 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연상호의 두 번째 실사영화인 <염력>에서 정유미가 연기하는 홍상무다. 이 악당의 기능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이런 역만 전담으로 하는 배우들도 몇 명 떠오른다. 하지만 이 흔해빠진 인물을 정유미가 연기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낯설고 괴상하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익숙한 짜증과 혐오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정유미의 홍상무는 우리에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염력>의 주연배우 류승룡은 홍상무의 캐릭터를 칭찬하면서 홍상무의 남자버전이 있다면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뜻으로 말한 의도는 알겠는데, 좀 당황스럽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류승룡에게 그 역이 넘어간다면 다시 흔해빠진 한국식 악당이 되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홍상무의 캐릭터는 오로지 정유미가, 그러니까 이런 식의 캐릭터와 전혀 연결이 안 되는 젊은 여자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나이가 올라가고 남자가 된다면 그는 뻔한 개똥철학을 나불대는 흔해빠진 ‘개저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악당들에게 지겨워진 지 꽤 오래됐다. 가장 지루한 부류는 종영한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전광렬이 연기한 악당인데, 한국에서 정치가 악당이 빠질 수 있는 거의 모든 함정에 빠진다. 혐오와 경멸과 증오를 자극하는 기계이며 미치도록 지루하다. 비슷하게 지루한 부류는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리턴>에서 봉태규가 연기하는 재벌 3세인데, 돈을 내고 아무나 구타하는 게 취미인 짐승이다. 재벌 3세 이미지에서 가장 불쾌한 점만 모아서 만든 인물로 역시 기능은 혐오와 경멸과 증오를 자극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실적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보다 더 초라하고 졸렬하고 시시하다. 자신이 작품을 통해 사회비판을 하거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이 이런 인물들을 최대한 혐오스럽게 그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가 <패딩턴> 시리즈 같을 수는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어리석음과 악을 보여주고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게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일단 예술적으로 진부해진다. 전광렬이나 봉태규의 캐릭터를 보는 게 따분한 이유는 이전에도 비슷비슷한 캐릭터들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깊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주의 다양성도 없다. 공장 생산되는 악당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지나치게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리턴>만 하더라도 악당들의 악당짓이 그렇게 많이 나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이미 첫 주의 혐오스러운 짓거리만으로도 캐릭터가 잡혔다. 이제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하지만 드라마는 여전히 이 악당들에게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하며 비슷비슷한 장면들을 반복해 보여준다. 보는 내내 계속 움찔하긴 하는데 진도가 나간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 비슷비슷한 장면들을 쓰느라 시간낭비를 하지 않았다면 불에 탄 시체의 유전자 검사를 위해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검시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보다 나은 걸 만들 시간이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나 소비하는 사람들이 혐오와 증오의 자극에 중독되었고 둔감해졌다는 결론 이외엔 도달할 수 없다. 오로지 악당들이 쿡쿡 찔러야 움직이는 이야기만이 그럴싸해 보이는 때가 된 것이다. 혐오나 분노가 아닌 다른 긍정적인 감정이 동기인 사람들을 상상할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이렇게 자극적이고 단조로운 악당들을 계속 생산해낸다면 어떻게 된다? 그들에게 목소리와 권력을 주게 된다.



이들과 비슷한 현실세계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들이 혐오스럽게 그려지는 걸 보고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할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이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최대한 관심을 덜 주는 것이다. 그들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홍상무와 같은 악당을 활용하는 것은 유일한 대안은 아니더라도 생각해볼만한 여러 대안 중 하나일 것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염력><패딩턴 2>스틸컷, 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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